흘러라,
생명의 물

개화기 이후 다양한 외래 음식이 들어오면서 한국의 식문화는 더욱 폭넓어졌다.
하지만 전통적으로 맵고 짠 맛에 길들여진 한국인의 입맛은 변하지 않았다.
해방 이후 산업화를 거치면서 ‘바쁜 한국인’은 식사 시간도 빨라졌다.
1897년, 궁중 비방으로 탄생한 활명수가 120년 동안 한국인과 동고동락한 이유다.
맛있는 음식의 역사와 함께 활명수는 흘러 왔다.

대식가의 나라

우리 민족에겐 밥 먹을 기회가 있을 때면 일단 많이 먹어두는 식습관이 당연한 시절이 있었다. 먹을거리가 풍족하지 않았으니까.
1890년대 한양을 찾은 영국인 여행가 이사벨라 비숍은 ‘조선 사람들은 한 사람이 3~4인분을 먹어 치우고
3~4명이 앉으면 20~25개의 복숭아와 참외가 없어지는 건 다반사’라고 기록했다. 임진왜란 피란기 <쇄미록>에는 당시 성인 남자가
한 끼에 7홉(밥 5공기)이 넘는 양의 쌀을 먹었다는 기록도 있다. 하지만 춘궁기엔 풀뿌리나 소나무 껍질을 먹을 만큼 식사량이 적었다.
불규칙한 식사로 배앓이가 잦았던 이유다. 이런 흐름은 1960년 광고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1960년대 활명수 TV 광고

생명을 살리는 물
활명수 의 탄생

대한제국이 설립되던 1897년 그해, 한의학에 정통했던 궁중 선전관 출신 민병호 선생이 동화약방을 설립하고 맨 처음 개발한 국산 양약 1호 활명수. 궁중 비방에 서양의학을 접목해 개발한 첫 번째 신약은 왜 하필 ‘생명을 살리는 물’이라는 이름이 붙었을까? 불규칙한 식사 습관, 과식과 폭식이 잦았던 당시 마땅한 치료제가 없어 급체와 토사곽란만으로도 목숨을 잃던 이가 많았기에 활명수는 시대가 가장 필요로 하는 양약이었고,
시대에 가장 적합한 브랜드 네임이었다.

활명수 최초 상표등록증
초창기 활명수

대한민국 음식의 역사와 함께 흐르다

  • 1940년대 음식 사진

    국물에 밥 한 공기 ‘뚝딱’

    쇠고기국밥, 돼지국밥, 콩나물국밥, 순댓국밥.... 국밥은 장터의 정을 떠오르게 하는 친숙한 서민 음식으로 재료에 따라 종류만 수십 가지다.
    가난한 사람들이나 급하게 한 끼를 해결해야 하는 사람들에겐 국밥만큼 간편한 음식이 없었다. 가장 오래된 외식업도 국밥집이다.
    우리는 국물에 친숙하다. 국물이 없는 한식 밥상은 없다. 식사는 국물로 시작하고 국물로 마무리한다. 라면 국물에도 밥을 말아 먹고, 떡도 국물과 함께 먹는다.
    다만 국에 밥을 말아 먹다 보면 입안에서 충분히 음식물을 씹어 부수고 소화효소와 음식이 충분히 섞이는 과정이 생략돼 소화에 부담을 줄 수 있다.

  • 1950~60년대 음식 사진

    난 짜장면, 넌 짬뽕

    한 조사에 따르면 매일 한국인 8명 중 1명은 짜장면을
    먹는다(짜장면뎐, 프로네시스). 1905년 인천을 통해
    우리나라에 소개된 짜장면은 1955년 미국의 밀가루 원조가
    본격화되고 우리 정부가 혼·분식을 장려하면서 대중화됐다.
    이후 짬뽕이 중국집 메뉴에 추가되면서 짜장면과 짬뽕은
    중국집 대표 메뉴로 경쟁하고 있다. 2000년 8월, 서울
    신사동의 중국집 태화루에선 ‘짬짜면’을 선보여 두 메뉴
    사이에서 고민하는 손님들의 고민을 덜어주기도 했다.

  • 1970년대 음식 사진

    엄마, 나 챔피언! Vs 라면 먹고 갈래?

    한국인에게 라면은 ‘제2의 밥’으로 불리기도 한다. 우리나라 국민의 라면 연간 소비량은 34억 개로 중국(468억 개),
    인도네시아(141억 개), 일본(54억 개), 미국(40억 개)에 이어 5위. 하지만 1인당 소비량은 75개로 세계 1위다.
    해물라면, 떡라면과 같은 라면의 서민적 이미지는 2010년 이후 모디슈머(Modify+Consumer·자신의 취향에 따라
    제품을 수정하는 소비자)로 인해 탈바꿈한다. 순대라면, 감자탕라면, 우유라면, 토마토라면 등 다양한 라면 요리법이
    주목을 받은 것. 과거 ‘가난’을 상징했던 이미지가 ‘애정 표현’의 주체로 자리 잡은 점도 주목할 점이다.
    1974년, 가난으로 ‘밥 대신 라면’만 먹고 챔피언에 오른 홍수환 선수는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라고 외쳤다.
    이후 2001년, 영화 ‘봄날은 간다’ 속 이영애(은수 역)의 대사 ‘라면 먹고 갈래요?’는 남녀가 연인 관계로 발전하는
    과정에 자주 사용하는 표현으로 자리 잡았다.

  • 1980년대 음식 사진

    패스트푸드 전성시대

    1979년 10월, 서울 롯데쇼핑센터(현 롯데백화점 본점)에 롯데리아 1호점으로 햄버거 시대가 열렸다. 햄버거는 80, 90년대
    대학가를 중심으로 인기를 끌면서 젊은 문화의 상징이었다. 경제 성장 속도만큼 식사 시간도 빨랐다. 하지만 2000년 들어
    웰빙 열풍이 불면서 ‘정크푸드’란 딱지가 붙었다. 여기에 다이어트 열풍이 불면서 ‘햄버거=고칼로리 음식’이란 인식이
    확산되면서 인기가 주춤했다. 최근엔 이태원, 강남을 중심으로 좋은 식재료로 만든 프리미엄 수제버거가 인기를 끌고 있다.

  • 1990년대 음식 사진

    행복 찾아 매운맛

    매운 음식으로 스트레스 해소, 기분 전환을 하려는 사람이 점점 늘고 있다. 기대와 달리
    매운 음식이 건강에 득이 될 건 별로 없다는 건 알면서도 말이다. 매운맛을 느낄 때
    나오는 엔도르핀이 주는 쾌감에 중독됐기 때문이다. 매운맛은 현실도피처인 셈이다.

  • 2000년대 음식 사진

    여전히 질보다 양?

    “저녁에 많이 먹으려면 점심은 적게….” 다양한 음식을 한번에 즐길 수 있다는
    장점을 지닌 뷔페를 먹는 날이면 드는 생각이다. 1980년대 후반, 패밀리레스토랑
    ‘코코스’가 서울 신사동에 문을 열었다. 호텔 뷔페와 비슷한 품질의 메뉴를
    제공하면서도 가격은 훨씬 저렴해 가족 단위 외식을 바라던 중산층에 매우 인기가
    높았다. 1997년 IMF 경제위기, 2000년 이후 찾아온 웰빙 문화 등으로 ‘질보다
    양’을 상징하던 뷔페 인기가 최근 주춤하고 있다. 하지만 그럴싸한 자리엔 어김없이
    뷔페가 등장하고 조였던 허리벨트를 느슨하게 푸는 사람도 여전히 있다.

  • 2010년대 음식 사진

    덜 먹고 잠 줄어든 우리, 괜찮아요?

    밥은 대충 먹더라도 달달한 디저트는 꼭 챙기는 시대다. 커피도 빠질 수 없다. 일반
    종이컵에 비해 용량이 3~4배나 큰 톨 사이즈 커피(355ml)를 2잔 이상 마신다. 수면
    시간도 줄었다. 성인 권장 수면시간은 최소 7시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조사한
    한국 직장인 평균 수면시간은 6.1시간으로 회원국 중 꼴찌다. 게다가 스트레스로 인한
    수면의 질까지 나빠지면서 소화불량을 호소하는 현대인이 많다.

시대는 변해도 늘 그 자리에

10월 12일 대한제국이 설립됐고
고종 황제가 초대 황제로 등극했다.

1897

일본에 의해 강제적으로 병합이 이뤄졌다.
사진은 순종친필교지인 한일병탄조약 문서.
하지만 순종은 한일병탄은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이루어진 것이므로
폐기돼야 한다는 유서를 남겼다.

1910

청산리 전투에서 독립군이 일본군에 승리했다.
사진은 전투에서 승전한 후 기념 촬영한 독립군의 모습이다.

1920

윤봉길 의사는 일왕의 생일날,
행사장에 폭탄을 던져 일본
상하이파견군 대장 등을 즉사시키는
사를 치르고 현장에서 체포되어 총살되었다.

1932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연합군에 패하면서
한반도는 일제 강점기에서 해방됐다.

1945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북한 공산군이
남북군사분계선이던 38선 전역에 걸쳐
불법 남침함으로써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사진은 북한의 원산 물류창고가 폭파되는 모습.

1950

5·16 군사정변 이후
군사정부가 종합적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발표했다.

1962

1953년 휴전협정 이후
1971년 9월 20일 판문점에서
남북 간 첫 공식회담이 열렸다.

1971

1988년 9월 17일부터
10월 2일까지 대한민국 서울에서
제24회 하계 올림픽이 열렸다.

1988

1995년 서울시는 광복 50주년을 맞이해
동화약품 순화동 본사에 서울 연통부 기념비를 세웠다.
서울 연통부는 1919년 상해 임시정부가
설립된 후 국내와의 비밀 연락책 및
독립운동 자금 모금 역할을 했다.
서울 연통부의 총책임자는
민강 동화약방 초대 사장이었다.

1995

3월 30일,
서울역광장에서 열린
경부 고속철도 1단계 개통식

2004

광복 70주년을 이틀 앞둔 8월 13일
국립대전현충원을 찾은 대전지역
초중고 학생들이 태극기를 들고
애국지사 묘역으로 향하고 있다.

2015

활명수,
넌 누구냐



  • 생년월일

    1897년  9

  • 나이

    120

  • 출생지

    서울

  • 몸값 변화 아래 테이블 내용입니다
연도별 활명수의 가격 상대비교
1910년대 1930년대 1965년대 1976년대 1983년대 현재
30ml 50ml 50ml 50ml 75ml
현재
18000원 수준
설렁탕 1그릇
가격과 동일
설렁탕 1그릇
60
설렁탕 1그릇
500
설렁탕 1그릇
1500
설렁탕 1그릇
8000
1910' 1930' 1965' 1976' 1983' 현재
연간 생산량 : 1    |     누적 판매량 : (2017년 1월 기준)

불어라,
맑은 바람

동화약품 120년… 남다른 기업 DNA

동화약품은 1897년 9월 25일 태어났다. 같은 해 10월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조선-대한제국-일제강점기를 거쳐 대한민국과 영욕을 함께했다. 한방과 서구 의학을 접목해 만든 활명수는
창업 때부터 지금까지 한국의 근현대사를 관통했다. 독립운동을 마다하지 않은 사회적 책임감,
끊임없이 혁신하는 기업가 정신은 동화약품과 활명수 120년 역사의 원동력이 됐다.

남다른 기업 DNA… 위험 무릅쓴 독립운동

상해 임시정부 비밀 연락소로 쓰인 동화약방 사무실

  • 옥고까지 치른 민강 초대 사장

    동화약방은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한 기업이다. 기업으로서는
    위험천만한 일이었지만 나라와 민족을 위한 행동을 피하지 않았다.
    3·1운동 직후에는 상해 임시정부와 국내 간 비밀 연락망인 서울연통부를
    운영했다. 활명수를 개발한 민병호의 아들로 초대 사장을 역임한 민강
    선생은 서울연통부의 행정책임도 맡았으며, 이 일로 옥고를 치렀다.
    서울시 중구 순화동 동화약품 창업지에는 ‘서울연통부 기념비’가 서 있다.
    독립운동 자금도 지원했다. 독립운동가들은 중국으로 이동할 때
    활명수를 지참했다가 이를 현지에서 비싸게 팔아 자금을 마련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 윤창식 사장 경제자립 국권회복 운동

    민족정신은 동화약품에 면면히 흐른다. 1937년 민씨 일가의 청에 의해
    동화약품을 인수한 5대 사장 윤창식 선생은 1914년
    조선산직장려계에서 총무를 맡았다. 경제자립을 통해 국권회복을
    도모하려는 조직이다. 1917년 경찰에 발각돼 윤창식 등 간부들이 구속
    수감되는 고초를 치렀고, 단체는 해산됐다. 하지만 조선산직장려계의
    정신은 1920년대 물산장려운동으로 이어졌다. 윤창식 선생은 신간회, 보린회
    등에도 많은 자금을 지원하는 한편 동화약품의 제2 창업을 주도했다.

  • 광복군 중대장 맡은 윤광렬 회장

    윤광열 명예회장은 보성전문학교(現 고려대) 시절 일제에 징집됐다가
    탈출해 광복군 주호지대(상해 주둔 독립군 부대) 5중대장직을 수행했다.
    1967년 까스활명수 발매를 주도하면서 소화제 시장을 확장했다.
    당시로서는 선도적으로 스위스 산도스사 등과의 해외 기술제휴, 중앙연구소
    설립 등 동화약품의 현대화에 앞장섰으며, 제약보국 및 사회공헌 차원에서
    국내 최초의 희귀의약품센터 설립 등을 통해 동화약품의 중흥을 이끌었다.

우리의 약재를 바탕으로 서양의 신식 제조법을
이용하니 확실한 효과가 있다!
-1909년 게재된 동화약방의 첫 번째 신문 광고 문안 중에서-
남다른 기업 DNA… 120년 이어온 혁신
  •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등록상표

    1910년 로고 1910년 로고 1910년 로고 1912년 로고 1913년 로고 1919년 로고 1930년 로고 1950년 로고 1957년 로고 1967년 로고 1967년 로고 1969년 로고 1977년 로고 2008년부터 현재까지 로고

    120년 동안 창업 때의 브랜드와 제품을 유지한다는 건 기적적인 일이다.
    국내에서 일업백년의 기업은 동화약품이 유일하다. 활명수로 120년이라는 세월을
    건너올 수 있었던 건 동화약품이 혁신에 둔감해서가 아니다. 반대로 시대를 앞질러 도전하고
    변화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동화약품은 브랜드라는 개념이 희미했던 1910년 부채표라는
    상표를 만들어 활명수의 가치를 높였다. 부채표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등록상표로
    기네스북에 등재돼 있다.

  •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쾌거를 알리다

    1936년 8월11일 손기정선수 마라톤 우승과 관련, 조선일보에 게재한 동화약방(현 동화약품) 활명수 광고 반도남아의 의기충천
    손기정, 남승룡 양 선수 우승 축하
    건강한 체력, 견인불발하는 내구력의 근원은 오직 건전한 위장에서 배태된다.
    건강한 조선을 목표하고 다 같이 위장을 건전케 하기 위해 활명수를 복용합시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이 금메달, 남승룡이 동메달을 목에 걸었을 때는
    이를 축하하는 광고를 게재하기도 했다. 민족적 자긍심을 높이기 위한 노력이었다.
    지금의 눈으로 보자면 매우 도전적인 스포츠 마케팅이기도 하다.

  • 끝없는 변화와 도전 ‘120세 젊은 기업’

    활명수 119년 한정판 카카오프렌즈와의 콜라보레이션 디자인 활명수 119년 한정판 카카오프렌즈와의 콜라보레이션 디자인 활명수 119년 한정판 카카오프렌즈와의 콜라보레이션 디자인 활명수 119년 한정판 카카오프렌즈와의 콜라보레이션 디자인

    활명수는 가장 오래된 의약품이지만 약효를 쉬지 않고 개선하고 있다. 활명수에 탄산을 첨가해 청량 효과를 높였고(1977년), 장에 좋은 오매(매실을 훈증한 생약)를 함유한 ‘미인 활명수’로 여성 시장을 넓혔고, 2016년에는 어린이를 위한 스틱형 포장의 ‘꼬마 활명수’를 만들었다. 젊고 신선한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한 도전을 멈추지 않고 있다. 활명수 119주년 기념판에서는 카카오프렌즈의 인기 캐릭터 프로도, 라이언, 네오가 활명수와 만났다. 117주년에는 미디어 아티스트 이용백, 팝 아티스트 이동기와 협업했다. 미인 활명수는 지난해 자라섬에서 열린 국제재즈페스티벌에 참여해 미디어 부스를 운영했다. 또 도끼, 자이언트핑크와 협업해 멋진 브랜디드 콘텐츠 뮤직비디오를 제작했다.

한가지
화평할
한자, 이인동심 기리단금(二人同心 其利斷金)

두 마음이 하나가 되면
그 예리함은 쇠도 자를 수 있다

한자, 국태민안 시화풍년(時和豊年 國泰民安)

나라가 화평하고, 해마다 풍년이 들어
나라가 부강하고 국민이 평안해진다

좋은 약이 아니면 만들지 마라.
동화는 동화식구 전체의 것이니, 온 식구가 정성을 다해
다같이 잘 살 수 있는 기업으로 이끌어라.
-5대 사장 보당(保堂) 윤창식-

중앙일보로 본 활명수 ‘그땐 이런 일이···

피서지의 함정 바가지 물가···
활명수 미리 사가세요

동화약품,부채표 상표.활명수 국내 최장 기네스북 한국판 등록증

동화약품,부채표 상표.활명수 국내
최장 기네스북 한국판 등록

110년 전 활명수 제조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우물터 사진

110년 활명수 ‘비밀의 샘’ 발견

[삶과 추억] 광복군 자원 입대···
‘까스활명수’ 선보여

공존 길 찾는 활명수 전쟁

머큐롬을 활명수로 착각하고 들이킨
야구선수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2946> 김영조 야구에 살다

동화약품 '까스활명수Q' TV CF광고

중년층 겨냥한 복고풍 광고 잇따라

시대별 활명수 디자인

아스피린과 동갑··· 80억 병 팔린 활명수

민족의 등불이 된 의로운 부자들